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명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현대 유니콘스]] 시절 === ||<-3> [[파일:1996 정명원 노히트노런.jpg|height=400]] ||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사실 정명원은 그해 마무리 투수였는데, 포시에 돌입하자 마무리 상황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코치들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연이은 접전으로 현대의 자랑거리였던 투수진들이 지치자 맏형 정명원이 자원해서 선발로 등판했다. 그리고 그게 대박을 터트렸다.[* 정규 시즌이 아닌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나온 기록이므로 비공인 기록으로 남는다. [[2004년 한국시리즈]] 때 [[배영수]]가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지만 라이온즈의 물타선 때문에 경기는 11회를 향했고, 결국 비공인 기록으로조차 남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 해태는 [[이종범]]이 20-20을 할 정도로 건재했고 [[홍현우]]도 20-20에 가까운 장타력과 OPS 0.9 이상 찍어주고 있었다. 여담으로 96년 현대의 팀 타율은 7위(.243), 해태의 팀 타율은 5위(.245)... 두 팀 다 투수들이 빵빵했기에 가능했고 타자들은 정말로 몇몇 선수들만 있었다. 현대 역시 [[박재홍(야구)|박재홍]]이나 [[김경기]]를 제외하면 과거 태평양 시절 물방망이 타선과 별 차이 없었다.] 상대는 그 해 우승 팀 [[해태 타이거즈]]. [[숭의야구장|인천]]에서 4차전을 끝내고 잠실로 올라가는 길에 해태 타자들은 [[김응용|코감독]]의 무시무시한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1998년 현대가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을 영입하며 [[선발 투수|선발]]로 전환하였고, 주장 완장을 찼다. 첫 [[선발 투수|선발]] 등판 경기에서 5회를 버티지 못하고 6실점으로 탈탈 털렸는데, 그 다음 등판 경기에서 '완투승'을 시작으로 괴물 모드로 각성(...), 14승 8패 '''1.86'''의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98년 정명원이 [[평균자책점]] 1.86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한 이후로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선발 투수]]는 2010년의 [[류현진]](평균자책점 1.82)뿐이다. 다만 저 쩔어주는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승수가 겨우(?) 14승에 패수는 8패나 되는데, 타선 지원이 다소 살짝 빈약했던 감이 크다. 당시 현대 타선이 [[박재홍(야구)|박재홍]]-[[스캇 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에 [[박종호(1973)|박종호]], [[박경완]] 등 괜찮은 타자들이 포진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시 [[마무리 투수|마무리]]였던 [[조 스트롱]]이 워낙 작가질을 많이 해서 승리도 몇차례 날아간 점도 감안해야 할 듯.][* 후덜덜한 점은 [[선발 투수|선발]]이면서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던 '''[[임창용]]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았다'''. 거기에 더 무서운 건 그해 8월 19일 [[한용덕]]에게 잠깐 1위를 뺏겼다가 바로 탈환한 뒤 ERA 1위 자리를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 [[1998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6이닝 무실점 선발승을 따내면서 본인의 힘으로 [[1998년 한국시리즈|팀의 첫 우승을]] 맛보는 감격을 누렸다. 이 때 생방송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승이 확정된 후 [[헹가래 투수]] [[정민태]]가 마운드에서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서 엉엉 울기 시작하자 정명원이 정민태를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1998년 한국시리즈 하이라이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 장면을 관중석과 TV로 본 [[도원전사]]들도 덩달아 대성통곡한 것은 덤.] 한 말이 '''"같이 고생한 [[최창호(야구선수)|창호]]와 [[박정현(투수)|정현이]]가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 때 [[박정현(투수)|박정현]]은 시즌 중 쌍방울에 트레이드된 상태였다. 태평양 시절 김성근의 '''엄청난 [[혹사]]'''로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현대가 [[조규제]]를 받는 조건으로 쫓아내듯 트레이드시켰다. 최창호는 '''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에''' LG 내야수 [[박종호(1973)|박종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는데, 하필 '''[[1998년 한국시리즈]] 상대 팀이 LG'''였다. 후에 [[최창호(야구선수)|최창호]]는 '그토록 염원해 왔던 우승이 이루어졌는데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곳의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져서 너무 화가 나더라' 라고 회상했다.] 그야말로 사나이들의 인정과 의리가 물씬 풍겨지는 진심어린 인터뷰가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1999시즌은 스트롱이 재계약에 실패하자 마무리 투수로 뛰었는데[*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야구)|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 ,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부진했다. 이 시기의 99현대의 투수진은 [[정민태]]와 [[김수경(야구)|김수경]]을 제외하면, [[위재영]], [[최원호]], [[임선동]] 같은 선발자원이 단체로 부진했으며 [[조규제]], [[조웅천]] 등의 계투진도 시원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무리이자 투수진 최고참인 정명원까지 부진했으니....[* 특히 스트롱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생긴 마무리 투수의 공백이 컸는데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 그나마 뒤에 들어온 [[박장희]]가 있어서 5위였지 안그랬다면 간소하게 뒤에 6위로 따라오던 LG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 물론 99시즌이 역대급 타고투저도 감안해야 겠지만 투수진이 정민태와 김수경을 빼면 모두 부진해서 가을야구를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0시즌은 5선발로 뛰면서 5승을 거두는데 그쳤으며[*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 3인방은 '''18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을 거두었다. 그렇다보니 4선발과 5선발이 이래저래 등판횟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5선발은 [[신철인]]과 [[마일영]]이 그 해 성공적인 데뷔를 하여 그나마 짐을 덜어줬다. 단지. 정명원의 개인사가 있었기에 좀처럼 선발 출장 비율이 [[중간계투]]로 나오는게 있었다.], [[2000년 한국시리즈|그 해 한국시리즈 4차전]]에 패전처리로 올라온 것이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만다. 그리고, 후배 [[염경엽]]과 함께 [[2001년]], [[수원 야구장|개막전]]때 은퇴식[* 염경엽과 정명원은 코치직을 잠시 다른 팀에서 했지만, 원클럽맨이고 같은 동향 사람이고, 정명원이 염경엽의 팀에 선수생활을 할땐 2년 먼저 입단한 선배다. [[https://mnews.joins.com/article/882052#home|정명원, 염경엽 은퇴]].]을 치루고 연수를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